신입생 수업을 시작할 때면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마을에 잔디밭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노인이 살았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날마다 몰려와 공을 차는 바람에 잔디밭은 늘 쑥대밭이 되었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고 쫓아내도 아이들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어느 날 노인은 아이들을 불러 말했다.
“여기서 두 시간 동안 놀아 주면 한 사람에게 10달러씩 주마.”
아이들은 신이 났다. 평소처럼 공을 차고 놀기만 하면 돈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들이 그날부터 가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노인은 2달러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두 시간을 채웠다. 그다음에는 50센트로 줄었다. 몇몇 아이는 돌아갔고 남은 아이들도 마지못해 놀았다.
마침내 노인이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하자 아이들은 화를 냈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데 우리가 왜 여기서 두 시간씩 놀아 줘야 해요?”
그날 이후 아이들은 잔디밭에 다시 오지 않았다.
처음에 아이들은 놀고 싶어서 놀았다. 돈을 받기 시작한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놀았다. 공도 잔디밭도 그대로였지만 놀이가 일이 되어 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들은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시험에 내지 않는 내용은 가르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교수님, 이거 시험에 나오나요?”
학생이 이 질문을 하면 가끔 맥이 빠진다. 그러나 학생만 탓할 수도 없다. 수업의 거의 모든 것에 점수를 붙여 놓은 사람은 우리 교수들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점수가 있는지 끊임없이 보여 주면서 배움 자체를 즐기라고 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인공지능이 답을 빠르게 만들어 주는 지금은 이 문제가 더 선명해졌다. 학생이 인공지능으로 얻은 답을 손으로 정성스럽게 옮겨 써 낼 때가 있다. 종이에는 풀이가 가득하지만, 읽어 보면 이해 없이 베껴낸 것이 투명하게 보인다. 그래도 과제의 형식을 갖추었으면 일단 점수를 준다. 점수를 입력하면서 문득 허전해진다. 과제는 제출되었고 점수도 생겼는데, 정작 배움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입생들에게 묻는다.
왜 대학에 왔는가.
왜 이 전공을 선택했는가.
왜 이 문제를 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내가 먼저 뜨끔한다.
나는 왜 가르치는가.
처음에는 공학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풀어 주고 싶었다. 강의실 밖에서도 한 사람의 멘토가 되고 싶었다. 학생이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마침내 자기 힘으로 해내는 순간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다른 것을 세고 있었다.
내가 받는 보수, 내가 속한 대학의 이름, 논문의 수,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나의 위치.
더 이름난 대학이 아닌 작은 대학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고,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생각했다. 학생들에게는 점수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나는 내 인생에 매겨진 점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기를 때도 비슷했다. 아이 자체를 바라보기보다 성적이나 진학 결과를 바라보는 순간, 사랑에도 성적표가 붙었다. 아이가 어디에 들어갔는지가 내가 얼마나 좋은 엄마인지를 증명해 주기를 바랐던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상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학점도, 보수도, 인정도 필요하다. 다만 그것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처음에 좋아했던 일이 견뎌야 하는 일이 된다.
이 글을 쓰며 뒤늦게 알았다.
나는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시계를 보지 말라고 말하면서, 정작 누구보다 자주 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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